2025. 4. 25. 21:58ㆍ카테고리 없음
"풍경은 눈으로 보지만, 기억은 귀로 남는다."
이 말은 내가 ‘소리 중심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카메라 없이, 이어폰 없이, 눈보다 귀에 더 집중하며 떠난 세계 일주.
그 여정에서 마주한 건 풍경보다도 더 생생한 소리의 풍경들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직접 귀로 담아온 그 순간들을 ‘사운드 트래블 다이어리’로 풀어보려 한다.
🎶 1. 스페인 플라멩코, 박수와 숨소리 사이의 예술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한 작은 바르(Bar).
어두운 조명 아래, 무대도 없이 단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기타리스트와 플라멩코 무용수. 그리고 그들의 박수, 구령, 발 구름, 숨소리.
처음엔 어색하게 들리던 그 박수 소리가 점점 리듬과 호흡으로 이어지더니, 어느새 나의 심장 박동과도 맞물리기 시작했다.
기타가 울리면 박수가 반응하고, 무용수의 발이 땅을 치면 숨소리가 관객석을 타고 전달되었다.
그 어떤 음향 장비보다도 강렬하고, 어떤 콘서트보다도 생생한 경험이었다.
플라멩코는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그건 소리로 감정을 터뜨리는 방식이었고, 모든 감정의 진폭이 리듬 안에 담겨 있었다.
지금도 그날의 박수소리만 들으면, 어둡고 따뜻한 바르의 공기, 탁자에 흐르던 레드와인의 향, 무용수의 눈빛까지 선명하게 떠오른다.
🌊 2. 뉴질랜드 피오르드에서 들은 가장 조용한 소리
뉴질랜드 남섬의 밀포드 사운드(Milford Sound)는 세계에서 가장 조용한 장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진정한 ‘침묵의 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보트가 깊은 협곡을 천천히 지나갈 때, 가이드는 엔진을 멈추고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세상의 가장 작은 소리를 들어보세요.”
엔진이 꺼지자, 그 순간부터 세상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암벽을 타고 떨어지는 소리, 새의 날갯짓 소리, 바다사자의 숨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의 침묵이 만들어내는 웅장한 울림이 있었다.
보통 우리는 '소리'를 '무엇인가가 나는 것'으로만 인식하지만, 이곳에서의 침묵은 오히려 하나의 ‘사운드 트랙’ 같았다.
아무 소리도 없을 때 들리는 내 안의 소리, 그 정적이 바로 귀로 듣는 또 다른 여행지였던 것이다.
🧳 3. 사운드 다이어리를 만든다는 것 – 기록의 또 다른 방법
여행을 하며 우리는 사진을 찍고, 영상을 남기고, 때로는 글을 쓴다.
하지만 나는 이젠 소리를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핸드폰 음성녹음 앱, 간단한 포터블 마이크 하나면 충분하다.
예를 들어,
교토 아침시장, 상인이 외치는 소리
프랑스 루아르 계곡의 새벽 종소리
태국 방콕의 수상시장 소란스러운 말소리
모로코 페즈의 이맘의 아잔(기도 부름 소리)
이 소리들을 날짜와 장소, 느낌을 짧게 메모와 함께 남겨두면,
몇 년 후 그 사운드 파일을 재생하는 순간, 그 장소로 순간 이동하게 된다.
요즘은 ‘ASMR 여행’ 콘텐츠도 많아졌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자신만의 감정이 담긴 소리를 수집하는 것.
그리고 그건 절대 같은 순간이 두 번 다시 오지 않기에 더 특별하다.
그 나라의 언어를 몰라도,
사람들의 말 속 감정을 ‘억양’으로 느낄 수 있고
시장 속의 활기를 '소리의 밀도'로 감지할 수 있다.
귀로 떠나는 여행은 단순히 감상을 넘어서,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아주 섬세한 여행 방법이다.
– 세계를 귀로 기억한다는 것
여행은 오감의 향연이다. 그중 ‘귀’는 종종 가장 늦게 주목받지만,
그 기억은 가장 길게, 그리고 가장 깊게 남는다.
이제 여행지를 정할 때, 그곳에서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를 먼저 떠올려본다.
도시의 야경보다 새벽의 종소리가, 유명 관광지보다 한적한 골목의 고양이 울음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당신도 다음 여행에서는 ‘귀로 기록하는 여행’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 사운드 트래블 다이어리는 언젠가 당신의 기억을 가장 섬세하게 꺼내줄 감성의 타임캡슐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