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조각들: 전 세계 전통 악기 체험기

2025. 4. 26. 22:01카테고리 없음


세상을 여행한다는 건, 각 나라가 가진 ‘소리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큼이나, 귀에 담기는 소리들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소리의 조각들: 전 세계 전통 악기 체험기


그중에서도 전통 악기는 한 민족의 삶, 정서, 풍경이 농축된 소리의 결정체다.
이 글은 그 ‘소리의 조각들’을 직접 체험하고, 손끝으로 울리고,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순간들을 기록한 여정이다.

🎐 1. 일본의 고토 – 소리로 피는 벚꽃


도쿄에서 북쪽으로 몇 시간 달려 도착한 전통 마을, 사이타마.
이곳의 문화센터에서 운 좋게 일본 전통 악기 ‘고토(琴, Koto)’를 직접 배워볼 수 있는 워크숍에 참가하게 되었다.

고토는 가야금과 비슷한 13현 악기로, 나무로 만든 몸통에 비단 줄이 얹혀 있다.
처음 줄을 튕겼을 땐, 너무 섬세하고 조심스러워 마치 유리잔을 두드리는 것 같은 맑은 소리가 났다.
강사가 가르쳐준 첫 곡은 ‘사쿠라(さくら)’, 즉 벚꽃을 표현한 전통 멜로디였다.

고토는 단순히 음을 내는 악기가 아니라, 자연을 담고 계절을 연주하는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음 한 음이 길게 울리며 사라질 때마다, 눈앞에 보이지 않던 벚꽃잎이 흩날리는 듯한 상상이 이어졌다.
“이 악기는 연주하는 사람이 얼마나 조용한 마음을 가졌는지가 소리에 드러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몇 번을 반복해 튕긴 끝에 이해할 수 있었다.

고토의 소리는 크지 않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 퍼지는 울림이었다.
그날 이후, 일본의 봄이 떠오르면 나는 ‘보는 풍경’이 아니라 ‘듣는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 2. 서아프리카의 젬베 – 공동체가 되는 리듬


세네갈 수도 다카르의 해안 마을.
뜨거운 태양 아래, 원형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이 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접한 악기가 바로 젬베(Djembe), 서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손북이다.

젬베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다.
마을의 소식, 감정, 축제, 슬픔… 모든 것을 이 북 하나로 나눈다.
손바닥과 손가락, 손날을 이용해 치는 위치에 따라 수십 가지의 소리가 나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사람들 간의 교감이었다.

가장 처음 북을 두드렸을 때, 내 소리는 리듬을 따라가지 못하고 들쭉날쭉했다.
하지만 옆 사람의 리듬을 듣고, 그 흐름을 받아치다 보니 어느 순간 하나의 큰 소리 물결 안에 내가 섞이는 느낌이 들었다.
젬베는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악기였고, 혼자 치는 게 아니라 함께 만들어야 진짜 음악이 되는 악기였다.

현지 장인은 말했다.
“젬베는 네가 중심에 있을 때는 울지 않는다. 네가 모두를 듣고, 자신을 낮출 때 가장 크게 울린다.”
그 말은 악기뿐 아니라, 삶에 대한 지혜처럼 들렸다.
그날 저녁, 해 질 녘 바닷가에서 들려온 젬베의 리듬은 마치 태양이 바다로 사라지는 소리 같았다.

🎻 3. 인도의 시타르 – 명상처럼 울리는 시간의 선율


인도 바라나시, 갠지스강이 흐르는 성스러운 도시.
이곳에서 만난 시타르(Sitar)는 단순히 음악을 위한 악기가 아니라, 정신을 위한 도구처럼 느껴졌다.
시타르는 다섯 개의 주현과 여덟 개의 공명현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처음 연주를 시도했을 땐, 그 복잡한 구조에 압도되었지만
강사의 안내로 한 음 한 음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걸 깨달았다.
이 악기의 소리는 ‘완성된 멜로디’보다 사이의 여백, 울림, 그리고 공명이 주는 감각이 더 중요하다는 것.

갠지스강이 잔잔하게 흐르고, 성가가 울리는 새벽녘.
그때 들은 시타르의 소리는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
모든 분주함과 욕망이 멈추고, 오로지 ‘존재’만이 남는 그런 순간이었다.

시타르는 인도 사람들에게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주는 소리라고 한다.
단순한 연주가 아니라, 기도와 명상의 연장선상이라는 그들의 해석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악기는 그 나라의 ‘소리의 얼굴’이다
각 나라의 전통 악기를 직접 체험하면서 느낀 건,
소리는 단순히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라는 것이다.
고토가 들려준 정적인 사색, 젬베가 보여준 공동체의 힘, 시타르가 이끈 영혼의 여백.

모두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모두 그 나라의 삶과 자연, 가치관을 소리로 설명해주는 도구였다는 것.

다음 여행에서는 단순한 감상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악기를 직접 만져보고, 들어보고, 짧게라도 연주해보는 경험을 추천한다.
그건 단순한 체험을 넘어서, 진정한 의미의 문화와 감정의 공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기를 배우는 건 어렵지만,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 작은 울림들이 쌓여서, 여러분만의 '소리의 조각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