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7. 22:04ㆍ카테고리 없음
여행을 떠난다는 건 결국 '낯선 일상의 속삭임'을 듣는 일인지도 모른다.
눈으로는 담기 어려운, 오직 귀로만 느낄 수 있는 그 나라의 진짜 숨결.
이제껏 내가 마주했던 가장 생생한 풍경들은 모두, 사진이 아니라 소리로 남아 있다.
오늘은 세계 각지에서 ‘현지의 숨소리’를 채집했던 기억들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꿰어 본다.
🕊️ 1. 모로코 페즈 – 시장의 소리, 삶의 리듬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페즈(Fès)는 수백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도시다.
좁은 골목길, 미로 같은 메디나(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눈보다 귀가 먼저 반응하게 된다.
이곳에서 내가 처음 채집한 소리는 바로 시장의 숨소리였다.
아침 7시. 아직 가게 문이 열기 전인데도 이미 거리는 살아 있었다.
빵 굽는 화덕에서 나는 타닥타닥 소리, 생선 가판대를 정리하는 칼의 긁힘,
그리고 “아와, 아와!” 하며 손님을 부르는 상인의 굵은 목소리.
그 모든 소리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도시를 천천히 흔드는 자장가 같았다.
정오가 되자 소리는 훨씬 밀도가 높아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염색공장에서 나는 찰방찰방 물소리, 마법처럼 오가는 아랍어와 프랑스어의 리듬…
그 속에서 나는 마치 수천 개의 악기들이 어우러지는 한 편의 즉흥 오케스트라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녹음을 하며 현지인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 소리들이 우리 가족이야. 매일 이 소리를 들어야 하루가 시작된단다.”
그 순간, 나는 ‘소리’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정체성과 정서 그 자체라는 걸 알게 됐다.
🌲 2. 핀란드 라플란드 – 침묵이 들려주는 북쪽의 언어
북유럽 핀란드, 북쪽 끝 라플란드 지방.
밤이 길고 눈이 많은 겨울, 이곳은 ‘조용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고요한 세계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도, 나는 많은 소리를 채집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눈 밟는 소리.
생각보다 더 크고, 리드미컬했다. 푹, 푹, 사각.
두터운 부츠가 신선한 눈을 눌러줄 때마다 나는 마치 누군가 내 마음을 천천히 쓰다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는 오로라를 기다리며 들은 바람 소리.
거대한 숲을 통과해오는 바람은 휘파람 같기도 하고, 사람의 숨소리 같기도 했다.
실제로 라플란드 사람들은 오로라가 나타날 때 바람의 소리도 달라진다고 믿는다.
나는 귀를 바짝 세워, 하늘 위로 누군가가 부르는 듯한 소리의 실루엣을 따라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핀란드식 사우나에서 들은 나뭇가지로 때리는 소리, 물을 부어 생기는 증기의 울림.
그 모든 것이 인간과 자연이 나누는 비언어적 대화였다.
라플란드에서 나는 깨달았다.
침묵도 소리이며, 그 나라의 언어라는 걸.
현지의 숨소리는 종종 ‘말 없는 말’로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 3. 베트남 메콩강 – 강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
베트남 남부, 메콩강 델타 지역.
이곳은 ‘강 위의 마을’이라 불릴 만큼 모든 삶이 물 위에서 이뤄진다.
보트를 타고 강을 따라 이동하며 나는 무수히 많은 물소리의 결을 녹음했다.
가장 먼저 마주한 건 노 젓는 소리.
현지 주민이 패들을 저을 때, 물이 갈라지며 ‘촤아-’ 하고 부서지는 소리는
마치 리듬을 가진 호흡 같았다.
그 소리는 강 전체가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시장 보트끼리 부딪힐 때의 ‘쿵’, 채소가 담긴 바구니가 물 위에 놓일 때의 ‘덜컥’,
그리고 보트에서 팔던 국수 냄비에서 나는 ‘푹푹’ 끓는 소리.
그 모든 것이 하루를 시작하고, 이어가고, 마무리 짓는 리듬이었다.
한 번은 작은 사원 앞에서 아이들이 불경을 흉내 내며 장난치는 걸 들었다.
그 소리는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이 땅의 종교와 놀이, 일상이 모두 뒤섞인 하나의 숨소리처럼 느껴졌다.
메콩강 위에서 내가 채집한 소리는 단순한 환경음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의 소리 그 자체였다.
소리는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현지의 숨소리를 채집하는 여행은
누군가의 일상을 존중하고, 그 땅의 시간을 천천히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소리는 순간이지만, 그 소리를 담은 순간은 기억보다 더 오래, 더 섬세하게 마음속에 남는다.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미세한 감정,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날의 공기.
그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건, 바로 ‘소리’였다.
다음 여행에서는 귀를 먼저 열고 떠나보는 건 어떨까?
익숙한 도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 마을도,
모두 저마다의 숨소리를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